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타루칸 마을의 패셔니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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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19년 12월 29일
필리핀은 일 년 내내 덥다고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울 코트를 입지 말라는 법은 없다. 패션은 개인의 자존심이니, 타루칸 마을에도 멋쟁이는 존재한다. 내가 사다 준 거울이니 머리끈은 라면이나 빵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호응이 좋았다. 타루칸 마을에서 옷을 대충 입었다고 흉볼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한껏 멋을 부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연말이었고 나는 뭔가 괜찮은 것을 사고 싶었다. 슈퍼 매대를 두 바퀴나 돌고 고민하다 고른 것은 세숫비누와 빨랫비누, 그리고 매직사랍이란 조미료이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에서 보내준 원고료를 손에 들고 그 금액에 맞추고자 꽤 고민하며 고른 것이다. 초코파이를 사두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하여 빵집에 가서 빵을 한가득 사고, 빵집 옆 사리사리 스토어에 가서 엠페라도 술도 두 병 샀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닷새나 지났지만, 마을 아저씨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술을 기부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 터이니, 뜻하지 않은 술에 아저씨들이 얼마나 즐거워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타루칸 마을 입구에서 남자 아이 하나가 내 모습을 보자 후다닥 집으로 달아난다. 아이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매달 이곳에 오는 일이 큰 기쁨이었다. 그런데 나를 보고 달아나니 좀 서운하다. 대체 왜 나를 피할까 생각했는데 오해였다. 아이는 이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아까와 옷차림이 달랐다. 아이는 놀랍게도 두꺼운 겨울 코트를 챙겨입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어지간한 추위가 아니면 꺼낼 엄두를 내지 않아 보이는 두꺼운 코트라서 땀띠가 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였지만, 아이는 자신의 코트가 꽤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필경 더울 터인데 싶어 덥냐고 물어보니 하나도 덥지 않다고 우긴다. 하지만 얇은 반팔 셔츠 차림인 내 등에도 송글송글 땀이 나고 있었다. 이 아이가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할 수 있을 정도의 희귀 체질일리도 없고, 설마 그럴리가 있을까 싶어 재빨리 코트 안에 손을 넣어 등 쪽을 만져보았더니 땀으로 흥건했다. 나는 땀이 이렇게나 많이 나는데 왜 덥지 않는 것이냐고 아이를 놀렸다. 아이는 부끄럽게 웃으면서도 끝내 패션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밝은 쪽으로 데려다가 패셔니스타 인증 사진을 찍어주었다.
세상만사 다 그렇지만, 매번 행복할 수는 없다. 타루칸 마을에 가는 일도 그렇다.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행복할 때도 있고, 가끔은 대충 기분만 좋을 때도 있다. 서로 물건을 가지겠다고 목소리 높여 싸우는 것을 보면 "아이쿠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타루칸 마을에 발걸음을 끊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매우 행복하기 때문이다. 새벽 공기는 달고 산의 바람은 상쾌하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아이들이 반갑게 달려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꼬마 녀석들의 웃음소리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오라는 이 없어도 갈 곳 많은 인간인데, 오라는 이가 생겼으니 자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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