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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953년,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취임 - '아시아 노벨상' 막사이사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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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콘텐츠 등록일:

2024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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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야안홀 건물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동상이다. 동상 아래에는 "말라카냥궁은 국민을 위한 궁전이다(Malacanang is the palace for the peopl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칼라야안홀 건물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동상이다. 동상 아래에는 "말라카냥궁은 국민을 위한 궁전이다(Malacanang is the palace for the peopl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봉봉 마르코스로 대통령이 바뀌면서 지금은 말라카냥궁에서 칼라야안홀(Kalayaan Hall)을 개방하지 않고 있지만, 예전에는 칼라야안홀의 대통령 박물관이 말라카냥 헤리티지 투어(Malacañang Heritage Tours)의 주요 코스였다. 그런데 칼라야안홀 건물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 다름 아닌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동상이었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말라카냥궁을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방했던 터라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필리핀 대통령 중 청렴과 결백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대통령이라고 하면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정부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고 외쳤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경호원 없이 외출할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었지만, 임기 중 불의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49세. 충분히 재임이 가능한 나이와 상황이었던 터라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부질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지만 않았더라도 필리핀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으리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라몬 막사이사이

· 본명: Ramon del Fierro Magsaysay

· 1907년 8월 31일 출생~ 1957년 3월 17일 사망(49세)

· 필리핀 제7대 대통령

· 대통령 재임 기간: 1953년 12월 30일 ~1957년 3월 17일

 

-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여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음

- 라몬 막사이사이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됨

- 대선 선거 캠페인에 캠페인송을 사용한 최초의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Ramon F. Magsaysay)는 다른 대통령과는 시작부터 좀 다른 인물이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젊었을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차곡차곡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지도 않았다. 라몬 막사이사이는 잠발레스에서 평범한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교 교사였으나 교장의 불합리한 요구를 거절하여 교사 자리에서 물러난 뒤 대장장이 등과 같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 시기 막사이사이는 학비 마련조차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운전기사 등의 일을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고 전해진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에 들어가 정비사로 일했다. 버스회사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매니저로 승진했다고는 하지만 부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평범한 버스 회사의 직원이었던 라몬 막사이사이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2차 대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라몬 막사이사이는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항일 게릴라 부대를 이끌며 게릴라군 지도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후크발라합 진압

1946년, 라몬 막사이사이는 전쟁 이후 치러진 선거에 출마하여 고향인 잠발레스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한다. 그리고 1950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에 의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부패한 군인들을 처벌하고 군대를 개혁하여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인 후크발라합(후크단)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것에 성공한다. 후크발라합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산 게릴라 조직은 농민이라는 버팀목이 없이 지속되기 어려우며, 공산반군을 지지하는 농민 대다수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반란만이 생존을 위한 해결책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무조건 무력으로 후크발라합을 진압하기보다는 반군 귀순자 정착 지원 등과 같은 적절한 회유책을 함께 동원했다. 그리고 농촌 지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여 후크발라합에 대한 농민의 보호와 지원을 차단했다. 라몬 막사이사이의 이런 일련의 시도는 군대가 농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불신 혹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군대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 성공한다.


1953년 대선

후크발라합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유명해진 라몬 막사이사이는 1953년 대선에 출마한 뒤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선거 캠페인을 진행했다. 다른 대통령 후보가 방문을 기피하는 빈민가와 낙후된 지역에까지 직접 찾아가서 선거 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평소 춤을 좋아했던 그답게 캠페인 징글(campaign jingles)이라고 하여 음악과 함께하는 대선 캠페인을 필리핀 최초로 시도했다. 1953년 봄, 라몬 막사이사이의 선거 캠페인 노래인 맘보 막사이사이(Mambo Magsaysay)가 필리핀의 거리 곳곳에 울려 퍼졌다. "막사이사이가 집권할 때까지 평화와 질서는 농담, 막사이사이가 없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죽을 거야"라는 가사가 붙여진 경쾌한 리듬을 가진 매력적인 라틴 재즈풍의 노래였다. 마침 맘보 가수인 티토 푸엔테가 마닐라 공연을 마쳤던 터라 비슷한 리듬을 가진 막사이사이의 선거 캠페인송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결국 라몬 막사이사이는 68.9%의 표를 얻으며 엘피디오 키리노를 누르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전시품

서민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 대통령

평범한 집안의 아들로 필리핀 제7대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필리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바롱 타갈로그(필리핀 전통옷)을 입고 "정부의 통치는 여러분을 위한 봉사여야 합니다."라고 외치며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정부와 군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에 올랐음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간소한 생활을 했다. 라몬 막사이사이의 대통령 생활은 대통령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의전을 거절하고, 대통령궁인 말라카냥궁을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방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족이나 측근에게 특권을 주는 대신 서민과 극빈층을 위한 정책 실현에 나섰다. 엘피디오 키리노 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공산주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깨끗하고 부패가 없는 행정부를 꾸려나가며 국민들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일본에서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배상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후크발라합 단원의 수가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농민 등 서민층을 위한 각종 법률이 제정되었다. 소작 기간을 보장하고 소규모 농가에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법률이었다. 토지개혁안은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농민들의 전국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본인부터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며 공무원의 부패를 근절하고자 애쓴 덕분이었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장례식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장례식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하지만 필리핀은 필리핀에 꼭 필요했던 위대한 인물을 너무도 빨리 잃었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57년 3월 17일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세부에서 연설을 마치고 마닐라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자정 가까운 시간 세부 라훅공항(Lahug airport)을 출발한 비행기가 추락한 것이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유산으로 낡은 집 한 채와 생명보험증권 한 장만을 남겼을 뿐이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유해는 마닐라 북부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소장품
서민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 막사이사이에게 필리핀 국민은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막사이사이상

The Ramon Magsaysay Award


올해 8월, '이웃집 토토로'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된 국제적인 상이다. 미국의 자선 단체 록펠러 재단이 후원한 자금으로 라몬 막사이사이상 재단(RMAF)이 설립된 뒤 1958년부터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하여 발표하고 있는데, 국적이나 인종, 성별 등과 관계없이 아시아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아시아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라몬 막사이사이상 재단(RMAF)에서 매년 8월 31일에 수여식을 진행하는 것은 이날이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수상자도 많은데, 2002년 법륜 스님이 평화와 국제 이해(Peace and International Understanding)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 흉상.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소장품
막사이사이 대통령 흉상.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소장품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전시품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전시품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각종 행사장에서는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바롱 타갈로그를 입어 바롱의 대중화를 도왔다.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전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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