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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필리핀 독립운동의 아버지가 된 언어 천재 호세 리잘(Jose Riz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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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콘텐츠 등록일:

2024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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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함께 책을 읽는 호세 리잘 - 칼람바에 있는 호세 리잘 박물관(Museo ni Jose Rizal) 소장품
어머니와 함께 책을 읽는 호세 리잘 - 칼람바에 있는 호세 리잘 박물관(Museo ni Jose Rizal) 소장품

필리핀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리잘을 빼놓기란 어렵다. 그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고, 언론인이면서도 작가였다. 필리핀 생활을 하다 보면 그의 이름을 수없이 듣게 되는데, 그만큼 그가 필리핀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호세 리잘

José Protasio Rizal

1861년 6월 19일 출생 ~1896년 12월 30일 사망

필리핀 혁명과 필리핀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잘(José Rizal)을 스페인식으로 발음하면 호세 리살이 되지만, 필리핀에서는 보통 리살보다는 리잘에 가깝게 발음한다. 필리핀 정부에서 배포한 독립운동가 영상에서도 호세 리잘이라고 발음되고 있다.


호세 리잘의 어린 시절

호세 리잘의 아버지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라구나의 칼람바에서 스페인 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사탕수수 농장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칼람바 지역에서 유일하게 석조로 된 집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상당히 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아버지의 재력은 11명이나 되는 아이 중 일곱째였던 아들을 마닐라에 있는 대학을 보낼 수 있게 했다.


호세 리잘의 어머니 역시 상류계층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높았다. 호세 리잘은 어머니에게 읽고 쓰기를 배웠는데 집에 따로 서가가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 살 때부터 책을 읽어서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이 아이를 부모는 의사로 만들기로 했으니, 호세 리잘은 마닐라로 가서 아테네오 대학과 산토토마스 대학에서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일러스트라도(Ilustrado)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서구식 양복을 잘 차려입고 해외 유학길에 오르는데, 안과 전문의가 되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마드리드와 유럽 등지에서 살면서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익혔고, 유럽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았다고 전해진다. 호세 리잘이 몇 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느냐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면, 11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21개국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보이는데 과연 어느 자료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최소 10개 국어 이상을 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일러스트라도(Ilustrado)와 필리핀 민족주의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Rizal Park)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Rizal Park)

유학생활과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

그런데 해외 유학이 호세 리잘에서 가져다준 것이 다양한 언어 능력만은 아니었다. 유럽에서의 생활은 일러스트라도 상류층의 청년에게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인식하게 했다. 외국에서 겪은 차별이 민족의식과 혁명 의식을 깨우치고 필리핀의 개혁과 해방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한 셈이다.

1887년 5월 29일, 호세 리잘은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라는 이름의 소설을 출판했다. 스페인이 필리핀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책이었다. 이 책은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게 하였고, 스페인 정부에서는 불온서적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스페인에서 유학 중이던 호세 리잘을 추방하여 필리핀으로 돌아가게 했다. 1892년, 호세 리잘은 필리핀으로 귀국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필리핀 민족동맹(La Liga Fulipina)이란 단체를 결성하여 스페인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일을 계속했다.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호세 리잘의 주장이었고, 필리핀 민족동맹은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을 시도했다. 스페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무장투쟁론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호세 리잘은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필리핀 사람도 스페인 사람과 같은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필리핀도 에스파냐의 한 지방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어 에스파냐 의회에 필리핀 지역구 의원이 진출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호세 리잘은 참정권과 시민권을 갖는 정도만을 주장했지만, 스페인 쪽에서 볼 때는 호세 리잘의 평화로운 저항도 눈엣가시였다. 아무리 온건한 움직임이라고 해도 저항의 씨앗은 일찌감치 없애야만 했다.


1892년 7월 7일, 스페인 총독은 호세 리잘을 무장 투쟁론자들의 배후로 몰아 민다나오의 다피탄City of Dapitan)까지 유배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당시로써는 마닐라에서 민다나오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지만, 다피탄에서 철창 속에 갇혀 감옥신세를 지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배지에서 호세 리잘은 홍콩에서 만났던 조세핀 브렉켄(Josephine Bracken)과 함께 사실혼 관계를 맺고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동네 주민을 진료하기도 하고, 인근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1896년 12월 30일 호세 리잘의 처형 장면
1896년 12월 30일 호세 리잘의 처형 장면

리잘파크에서의 공개 총살형

1896년 8월, 필리핀에서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조직한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에 의해 푸가드 라윈의 통곡(Cry of Pugad Lawin)이란 이름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스페인 총독부에서는 호세 리잘을 카티푸난이 일으킨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하여 산티아고 요새에 수감시킨다.


1896년 11월 13일, 호세 리잘은 스페인 총독부의 명령에 따라 마닐라로 이감되어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식민 폭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마닐라 바굼바얀(현재 리잘공원이 있는 자리)에서의 공개 총살형을 선고했다. 반역 혐의로 처형된 뒤 호세 리잘은 파코묘지(현재의 파코공원)에 묘비도 없이 매장되었고, 호세 리잘의 가족들은 미국 식민지 시대가 되고 난 뒤에야 정식으로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호세 리잘의 유해는 1913년에 리잘파크에 있는 호세 리잘의 기념비(Rizal Monument)에 안장되었다.


· 1896년 12월 26일: 스페인 군사 법원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음

· 1896년 12월 28일: 스페인 총독이 사형 선고를 확정함

· 1896년 12월 28일: 리잘의 가족들이 스페인 총독에게 호세 리잘을 살려달라고 간청함

· 1896년 12월 29일: 호세 리잘이 어머니가 아들을 마지막으로 만남

· 1896년 12월 30일 오전 6시 30분: 산티아고 요새에서 처형장으로 이동

· 1896년 12월 30일 오전 7시 3분: 공개 총살형으로 호세 리잘 사망


후에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1896년 12월 30일 아침 호세 리잘은 조세핀 블렉켄과 결혼 서약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호세 리잘은 결혼식을 마친 뒤 처형장에 올라 등에 총을 맞고 삶을 마감한 셈이다. 마지막 인사로 《나의 마지막 작별(Mi Ultimo Adios)》라는 이름의 시를 남기고 총살 당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다섯 살이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호세리잘의 나의 마지막 작별(Mi Ultimo Adios) 한글 번역본



호세 리잘의 죽음 이후

호세 리잘의 안타까운 죽음은 필리핀의 청년들을 필리핀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호세 리잘에 대해 미국 식민지 시절에 미국 정부로부터 지명받아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300년 가까이 집에 있던 도둑들에게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주인의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운동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호세 리잘의 죽음을 보고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니, 필리핀 독립에 불러온 여파가 컸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Rizal Park)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Rizal Park)
필리핀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포트 산티아고)
필리핀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포트 산티아고)
필리핀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포트 산티아고)
필리핀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포트 산티아고)
산티아고 요새(포트 산티아고)의 Jose Rizal Monument
산티아고 요새(포트 산티아고)의 Jose Rizal Monument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HCP(National Historical Commission of the Philippines)

· Official Gazette: Celebrating Rizal and the National Language

· https://www.joseriz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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