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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스페인 귀족의 별장이 필리핀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냥궁이 되기까지 역사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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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콘텐츠 등록일:

2024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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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강처럼 마닐라를 관통하는 파식강(Pasig River)을 지나다 보면 백색의 커다란 석조건물을 볼 수 있다. 바로 필리핀 대통령의 공식 거주지인 말라카냥궁(Malacañan Palace)이다. 말라카냥궁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갑을 열어서 가지고 있는 20페소 지폐를 꺼내 보자.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20페소 지폐에 그려진 건물이 바로 말라카냥궁이다.


필리핀 20페소 지폐
필리핀 20페소 지폐

 

필리핀 말라카냥궁

Malacañan Palace

Malacañang Palace

필리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

 


스페인 식민지 시대

1571년~1898년


말라카냥궁의 역사는 무려 17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50년, 마닐라에 살던 스페인 귀족 돈 루이스 로차(Don Luís Rocha)는 파식강에 무려 16 헥타르(약 4만 8천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유행에 따라 강변에 여름 별장으로 사용할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게 바로 말라카냥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1750년에 카사 로차(Casa Rocha)가 지었을 때만 해도 그저 돈 많은 스페인 귀족의 시골 별장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로서는 최고급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고, 내부에도 비교적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었었다고 하지만 지금과 같은 큰 규모의 시설은 아니었다.


돈 루이스 로차는 1802년 11월 16일에 그의 여름 별장을 스페인 군대의 호세 미구엘 포르멘토(José Miguel Formento) 대령에게 팔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매매 가격이 천 페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1825년 1월에 포르멘토 대령이 죽고 말았다. 포르멘토 대령의 유언 집행인은 카사 로차(현재의 말라카냥)를 매물로 내놓았고 스페인 정부에서는 필리핀 총독을 위한 여름 휴양소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5천 페소를 주고 집을 샀다. 이후 말라카냥은 매해 여름이면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1847년에 이르러 스페인 총독은 말라카냥을 스페인에서 온 고위직 관료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원래 스페인에서 온 관료들은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정부 관저에서 생활했었지만, 지배층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여름의 더위를 피할 재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여름이면 뜨거운 열기와 모기떼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지경이 되곤 했으니, 스페인 정부에서 관료들을 강가에 있는 말라카냥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부 주요 관료들이 생활하다 보니 말라카냥은 자연적으로 고위 관료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말라캬냥의 규모가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은 지진 때문이었다. 1863년 6월 3일, 인트라무로스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게 된다. 지진으로 인트라무로스 안에 있던 팔라시오 델 고베르난(Palacio del Gobernado) 등 정부 건물 상당수가 파괴되자 관료들의 집무실이 하나둘 말라카냥 쪽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높으신 양반들이 대거 이사했으니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공사가 진행된 것은 당연지사. 큰 비용을 들여 확장 및 개조공사가 진행되는데, 안뜰 및 옥상 시설 등을 만들고, 미닫이문 형태의 카피즈 창문(Capiz window)을 다는 등 스페인풍의 장식으로 건물을 꾸몄다고 한다.



말라카냥궁으로 들어오는 마누엘 L. 케손 대통령
말라카냥궁으로 들어오는 마누엘 L. 케손 대통령

미국 식민지 시대

1898년~1946년


1989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파리조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된다. 길고 길었던 스페인 식민지 기간(1571년~1898년)이 끝났지만, 이제 미군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필리핀을 점령한 미국에서는 말라카냥궁을 미국령 필리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하기로 했다.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의 초대 총독(Governor-General)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칼라야안홀(Kalayaan Hall) 등을 새로 지어 말라카냥궁의 규모를 확장하고, 대대적으로 건물 개조 및 수리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수 시설 및 전기 시설을 설치하고, 장마철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목재 부분을 콘크리트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미군 국기를 달기 위한 게양대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14명의 미국령 필리핀 총독이 거주하는 동안 말라카냥궁의 모습은 현재와 비슷한 모양으로 외관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1934년에 타이딩스-맥더피법(필리핀 독립법)이 통과되면서 말라카냥궁의 주인이 바뀌었다. 1935년 선거를 통해 자치정부의 대통령이 선출된 것이다.


1935년,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누엘 케손 대통령이 말라카냥궁에 자리를 잡게 된다. 아직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필리핀 대통령의 자격으로 처음 말라카냥궁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말라카냥궁 내부 규모를 확장하는 한편 해마다 우기면 찾아오는 파식 강의 범람과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는 작업을 하는 등 외부 시설개선에도 힘썼다. 하지만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1942년 일본군이 마닐라를 점령하면서 말라카냥궁을 떠나야만 했다. 1945년에 일본 점령기가 끝나고 다시 코먼웰스가 시작되었지만,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1944년 미국 망명 생활 중 사망하여 말라카냥궁에 돌아오지 못했다.

말라카냥궁에 입주한 뒤 촬영된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가족 사진
말라카냥궁에 입주한 뒤 촬영된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가족 사진

일본 점령기

1942년~1945년


일본이 마닐라를 점령한 뒤 말라카냥궁은 일본군의 지배하에 감옥으로 사용되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험난한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말라카냥궁은 남서쪽 지역 일부만이 손상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닐라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정부 건물이 되었다.



독립 이후

1946년 7월 4일~현재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며 지긋지긋하리만큼 길고 길었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독립 이후 현재까지 말라카냥궁을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필리핀 대통령궁이라고 하면 커다란 말라카냥 팰리스(Malacañang Palace) 건물 하나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청와대와 마찬가지로 말라카냥궁도 실제 여러 개의 건물과 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라카냥궁에서 지속적으로 대통령궁과 인접한 토지를 매입하여 부지를 넓히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한 결과이다.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Malacañang Palace complex) 우측의 마비니홀에서 좌측에 있는 골든버그 맨션까지 1km 정도 떨어져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말라카냥 팰리스(Malacañang Palace) 본관을 중심으로 ▲칼라야안홀(Kalayaan Hall)과 ▲뉴 이크제큐티브 빌딩(New Executive Building) ▲마비니홀(Mabini Hall) ▲보니파시오홀(Bonifacio Hall) 등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파식강 건너편에 있는 ▲바하이 팡굴로(Bahay Pangulo)도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의 건물에 속한다.


말라카냥 궁전 단지의 게이트 바깥에 있기는 하지만 ▲PBS-RTVM 방송국(대통령의 활동을 문서화하고 뉴스를 배포하는 곳)과 ▲테우스 맨션(Teus Mansion)바하이 웅나얀(Bahay Ugnayan), 골든버그 맨션(Goldenberg Mansion, 레가르다 맨션(Legarda Mansion), 레퍼럴 맨션(Laperal Mansion) 등도 모두 말라카냥궁의 시설이다. 말라카냥 궁전 단지는 일반인 접근이 엄격히 제한되지만, 테우스 맨션과 바하이 웅나얀만큼은 말라카냥 헤리티지 투어(Malacañang Heritage Tours)를 통해 방문할 수 있다.



Malacanang Floor Plan (1950)
1950년에 만들어진 말라카냥궁 평면도(Malacanang Floor Plan)

말라카냥 팰리스(본관)

Malacañang Palace

말라카냥 팰리스(Malacañang Palace) 본관은 영웅의 홀과 리셉션홀 등 10개의 홀로 구성된 건물이다. 20페소 지폐에 그려진 말라카냥궁 건물이 바로 말라카냥 팰리스(Malacañang Palace) 본관이다. 대통령 집무실 및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어 일반인의 방문이 엄격히 금지된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다고 모두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의 메인 건물인 말라카냥 팰리스 본관에 사는 것은 아니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과 피델 라모스 대통령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호화롭게 꾸며둔 본관 건물에 사는 것을 거절하고 영빈관인 레퍼럴 맨션(Arlegui Guest House)에서 살았다. 그리고 베니그노 아키노 3세와 두테르테 대통령은 말라카냥 팰리스 본관이 아닌 바하이 팡굴로(Bahay Pangulo)에 거주했다.


그렇다면 말라카냥궁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대통령은 누구일까?

말라카냥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대통령은 재임기간이 21년이나 되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재임 기간 : 1965년 12월 30일~1986년 2월 25일)이다. 그런데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필리핀 경제를 거덜 낸 사치의 여왕으로 유명한 인물이니, 그 긴 기간 동안 말라카냥궁에는 이멜다의 사치스러운 취향이 한껏 반영되었다. 실제 말라카냥궁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 이멜다 마르코스의 주도하에 부지를 넓히고 인테리어 공사를 전체적으로 새로 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시기였던 터라 마르코스 부부의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앞두고 진행된 공사에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로 엄청난 공사 규모였다. 대통령 가족과 손님들을 위한 스위트룸이 만들어졌고, 창문에는 방탄유리가 끼워졌다. 내부의 바닥에는 고급 나무로 된 마룻바닥, 이탈리아산 대리석이 깔렸으며, 천장에는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달렸다. 접견실의 마르코스를 위한 좌석은 방문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다른 좌석보다 높게 설치되었다. 이멜다를 위한 침실과 욕실도 호화롭게 만들어졌는데, 황금으로 된 세면대와 함께 화려한 욕조 위에는 거울로 된 천장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공사를 마친 말라카냥궁 안에는 440㎡(약 133평)의 커다란 방이 마련되었고,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최고급 의류며 명품 구두, 가방 등 온갖 사치품이 방 안에 쌓이게 되었다. 1,500개의 핸드백과 함께 수백억 원에 달하는 고가의 미술품도 비밀리에 말라캬냥궁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중에는 빈센트 반 고흐와 파블로 피카소 작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끝이 있는 법이다. 1986년에 필리핀에 피플 파워 혁명(EDSA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1986년 2월 25일,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칼라야안홀의 2층 북쪽 발코니에서 그 모습을 보인 것을 끝으로 말라카냥궁에서 사라져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가난에 찌든 수많은 시민이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말라카냥궁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보았던 것은 황금으로 도금한 이멜다의 동상과 수입품 가구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 사치스러운 광경이었다.


말라카냥궁
말라카냥궁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에 있는 산미구엘 성당(San Miguel Church).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에 있어 말라캬냥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에 있는 산미구엘 성당(San Miguel Church). 말라카냥 팰리스 단지에 있어 말라캬냥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산미구엘 성당(San Miguel Church)
산미구엘 성당(San Miguel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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