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역사: 1872년, 곰부르자(GOMBURZA) 신부의 공개 처형과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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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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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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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식민지 시대 가톨릭 신부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 그 이상이었다. 스페인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원주민(필리핀인)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수도사들은 가톨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원주민의 언어를 배웠으니, 스페인 지배계층과 원주민인 필리핀인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의 역할은 가톨릭 신부에게 맡겨졌다. 가톨릭교회에서 스페인 정부로부터 거대한 규모의 토지를 받아 소작농에게 임대하면서 경제적인 영향력도 커졌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말기가 되면서 가톨릭 사제는 필리핀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메스티조(메스티소) 혼혈인과 필리핀인이 신학을 공부하여 신부가 되기 시작하면서 교회 내부에서 차별의 문제가 생겨났다.
18세기 이후 스페인에서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메스티조와 필리핀인도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장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기존의 성직자들이 반겼을 리가 없다. 필리핀계 성직자에게 교회에서의 권력을 뺏기고 싶지 않았던 가톨릭교회는 메스티조와 필리핀인은 주임 신부로 임명되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들을 차별했다. 메스티조가 성직자가 되는 것을 아예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가톨릭 수사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해지자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 신부는 교회 안에서 차별을 철폐하는 교회 개혁 운동을 벌였다. 세 신부 모두 필리핀인, 중국인, 스페인인 등의 혈통을 가진 메스티조(혼혈인)로 성당 내에서 상당히 높은 품계까지 오른 상태였지만, 필리핀인 성직자(native clergy)의 권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들 신부의 교회 개혁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것이다.

곰부르자 신부 처형
GOMBURZA
1872년 2월 17일
1872년 1월 20일 마닐라의 근교에 있는 카비테의 포트 산 펠리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이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여 일어난 단순한 반란이었는지 아니면 스페인 식민지 정부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있는 반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을 달리하지만, 포트 산 펠리페에서 일하던 필리핀인 노동자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을 면제받을 수 없게 된 것을 알게 되며 분노하여 봉기한 것만은 확실하다. 약 200명의 메스티조(혼혈인) 군인과 노동자들이 모여 스페인 장교를 죽이고 순식간에 요새를 장악했지만, 지원군이 없는 상태였던 터라 스페인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카비테 반란(1872 Cavite mutiny)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스페인 수도사들은 이 사건을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던 호세 부르고스 신부 및 메스티조 신부들을 제거할 기회로 삼았다.
1872년 2월 17일,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 신부는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된다. 이들이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급하게 진행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교살형(Garrote)을 당했다. 세 명의 신부가 바굼바얀(현재의 리잘파크)에서 목졸라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곧 빠르게 퍼져나갔고, 필리핀 사람들은 마리아노 고메즈(Mariano GO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자모라(Jacinto ZAmora) 세 신부의 이름을 앞 글자를 따 곰부르자(GOMBURZA)라고 불렀다. 곰부르자 신부의 묘지는 파코묘지(현재의 파코공원)에 있다.
그런데 곰부르자 신부는 정말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대로 된 조사 과정 없이 스페인 신부들의 증언만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곰부르자의 순교 사건은 필리핀 민족의식을 자극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고자 곰부르자 신부를 처형했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곰부르자 신부의 처형은 필리핀인들이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1891년 호세 리잘은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의 속편에 해당하는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El filibusterismo)》을 출판했다.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풍자화하고 종교적 위선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었다. 호세 리잘은 소설 서문에 억울하게 처형된 곰부르자(GOMBURZA) 신부에게 책을 바친다고 적었고, 이 책을 통해 필리핀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리고 필리핀 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Historical Commission of the Philippines (NHCP): The Two Faces of the 1872 Cavite Mutiny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NATIONAL MUSEUM ILOCOS EXHIBITIONS
· Harvard Divinity School: Catholicism in the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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