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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친일파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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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콘텐츠 등록일:

2024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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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벽화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50년 전 어느 날의 날씨에 대한 기록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1869년 3월 23일의 카비테의 카윗(Kawit) 지역 날씨만큼은 예외이다. 이날 마을에는 조용한 더위가 감싸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트리니다드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 오롯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째 진통이 계속되었지만 아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산파가 와서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지만, 트리니다드의 남편은 아이가 건강하게 나오기를 바라며 준비해 두었던 폭죽을 터트리기로 했다. 팡팡,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고, 트리니다드는 이 폭죽 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라는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아이였다.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
Emilio Aguinaldo y Famy

 

에밀리오 아기날도

· 본명: Emilio Aguinaldo y Famy

· 1869년 3월 22일 출생~1964년 2월 6일 사망

· 필리핀 제1대 대통령

· 대통령 재임 기간: 1899년 1월 23일~ 1901년 3월 23일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말라카냥궁 투어 중 테우스 맨션(Teus Mansion)의 필리핀 대통령 전시관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대통령 재임 기간을 1899년 1월 23일부터 1901년 3월 23일까지라고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고 필리핀 혁명정부의 초대 대통령(필리핀 제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어릴 적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고 한다. 마닐라 근교의 지방 소도시인 카비테 카윗(Kawit)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를 만나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글을 읽고 쓰는 방법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상황이 어려워졌다. 이 당시 아기날도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하는데, 비사야로 소금을 운송하기도 하고, 마닐라까지 카라바오 물소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스페인 군대에 강제 징병 되는 것을 피하고자 세금 징수를 하는 공무원 일을 하기도 했다.


필리핀 독립운동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된 것은 마닐라 산토 토마스 대학에 다닐 때 호세 리잘이 지은 책,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을 읽으면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스페인인들이 자국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식민지 필리핀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책은 당시 금서였지만, 청년 아기날도는 기꺼이 이 책을 손에 들었고, 호세 리잘을 바라보며 독립 투쟁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많은 청년과 많은 마찬가지로 에밀리오 아기날도 역시 호세 리잘이 필리핀 민족동맹(La Liga Fulipina) 결성으로 민다나오까지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리핀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조직한 민족주의 무장 투쟁 독립운동 단체인 카티푸난(KKK)에 가입하여 카비테 지역의 책임자로 일했는데, 1895년 카비테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했다.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임시 혁명정부를 전국적인 정부로 구상했지만, 독립 정부의 힘만으로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897년 12월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스페인 총독과 비악나바토 조약을 체결했는데, 스페인이 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는 대신 아기날도는 스페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필리핀을 영구히 떠나기로 하는 내용의 협정이었다. 이후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해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생각한 민족 해방 운동의 방식은 '위대한 미국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1898년 4월에 미국-스페인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도우리라고 믿었던 듯하다. 어찌나 미국을 믿었는지,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 헌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는데 식민지를 두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겁낼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필리핀의 독립보다는 자국을 위한 새로운 시장 개척이 우선이었다.


필리핀 불라칸 말로로스, 필리핀 제1공화국 박물관(Museo ng Republika ng 1899)
필리핀 불라칸 말로로스, 필리핀 제1공화국 박물관(Museo ng Republika ng 1899)

필리핀의 독립 선언

마닐라만 전투에서 미국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기날도는 1898년 5월 19일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1898년 6월 12일,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고향인 카비테 카윗의 집에서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필리핀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고 하여 필리핀이 실질적인 독립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1898년 8월 14일에 스페인은 미국에 항복했지만, 1898년 12월 10일 맺어진 파리조약(미국-스페인 강화조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미국으로 넘기게 된다.


혁명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듯한 기운이 있던 1898년 9월, 필리핀 혁명정부(필리핀 제1공화국)는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해 불라칸에서 말로로스 의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899년 1월 21일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서 필리핀 제1공화국의 기본법인 말로로스 헌법(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1899)을 제정한다. 이후 1899년 1월 23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서약하면서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곧 필리핀-미국 전쟁(Philippine-American War)이 일어나게 된다.



미국에 충성선서

1902년 7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이 평정되었으며, 필리핀-미국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선언했지만, 아기날도 체포를 기점으로 필리핀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고 평가된다. 1899년에 시작된 필리핀-미국 전쟁은 실질적으로 1901년 3월 23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사벨라 주에서 미군에게 잡히면서 끝이 나게 된다.


미군에 체포된 이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1년 4월 1일,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필리핀인들에게 미국과 싸움을 중지하고 미국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초대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국에 충성선서를 하면서 필리핀 제1공화국은 해체된다. 미국 식민지 시대,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기로 하고 카비테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일본 점령기 친일 활동

1941년 12월 필리핀 내 미군 기지를 공습한 일본은 이듬해인 1942년 1월 마닐라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해 2월 1일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라디오를 통해 일본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내보냈다.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한 1942년에서 1945년 사이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일본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일본의 꼭두각시 대통령인 호세 라우렐이 취임식을 할 때도 라우렐의 옆자리를 지켰을 정도이다.


전쟁 후 미국군이 돌아오자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은신처로 피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가택 연금에 처한다. 그는 당시 일본군의 강압으로 인하여 일본에 협력했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일본 점령기 때 일본에 협조한 혐의로 기소된다. 하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48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친일협력자들에 대한 일반사면을 결정하면서 친일 행위에 대해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1964년 2월 6일에 퀘존 시티에 있는 베테랑 메모리얼 메디컬 센터(Veterans Memorial Medical Center)에서 관상동맥혈전증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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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canang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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