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역사: 1863년, 공립학교 설립 - 왜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할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2024년 10월 22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사람 대부분은 필리핀 독립선언문이나 말로로스 헌법을 전혀 읽을 수 없다. 필리핀어(타갈로그어)나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호세 리잘이 쓴 소설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도 마찬가지이다. 스페인어로 작성되어 번역본을 보지 않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민다나오의 잠보앙가에 가면 스페인어를 기반으로 한 차바카노어(Chavacano)가 사용된다고 하지만, 필리핀 전체 인구를 생각하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할까?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필리핀 타갈로그어의 단어 중 약 30%는 스페인어 단어를 빌려다 만든 차용어라고 한다. 필리핀은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인지라 약 4천 개의 타갈로그어 단어가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지만, 오랜 기간 스페인의 식민지였음에도 스페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조금 독특하다. 이에 대해 '스페인에서 봤을 때 필리핀인은 스페인어를 가르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스페인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설명은 100% 옳은 설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필리핀에 온 성직자들이 원주민(필리핀인)이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페인어 교육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페인어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페인 지배계층은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현지인 출신의 하급 관리를 필요로 했고, 이들이 스페인어를 구사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메스티조(혼혈인)의 경제활동 및 교육을 장려했다.
1863년, 공립학교 설립
1830년 뇌졸중으로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한 뒤 스페인 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딸인 이사벨 2세 여왕(Isabel II de Borbón)이었다. 이사벨 2세 여왕은 고작 3세의 나이에 스페인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카를로스 전쟁을 거치고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1868년 혁명으로 왕위를 뺏길 때까지 여왕 자리를 지켰다. 이사벨 2세 여왕은 여왕으로서의 자질 논란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스페인 여왕 자리에 있으면서 이룬 업적 중 하나가 바로 1857년 공공교육법(모야노법)의 공표이다. 스페인의 높은 문맹률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이 공공교육법은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교육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863년 12월 20일 제정된 교육령(Educational Decree)에 따라 필리핀에 스페인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공립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산수 그리고 교리 문답 등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료 교육 시설로 인종이나 성별, 부모의 재산 등과 관계없이 교육을 제공했다. 물론 초등교육이 무료가 되는 스페인 교육령이 생겼다고 하여 갑자기 모든 필리핀인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공립학교의 설립은 중상류층의 필리핀인 아이들이 스페인어를 배울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성직자들에 의한 교육
흥미로운 것은 스페인어 교육에 소극적이었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학교의 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1521년에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필리핀 호몬혼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스페인 원정대의 배에는 늘 사제들이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1571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인트라무로스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필리핀 제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선언한 이후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1571년)의 뒤를 이 프란치스코회(1578년), 예수회(1581년), 도미니크회 수도회(1587년)의 성직자들이 차례로 필리핀에 도착했다.
교회 안에서 종교로 통합된 마을을 만들어서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던 스페인의 비호를 받으며 선교사들은 매우 의욕적으로 종교 전파에 나섰지만, 10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는 섬나라 필리핀에 가톨릭을 전파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역마다 다른 언어로 인해 필리핀인들조차도 서로 소통이 어려운 상태인데, 대체 어떻게 이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행정에 있어서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지만, 선교 활동에 있어서는 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페인 성직자들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친 뒤 복음을 전달하지 않았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들이 필리핀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배우는 쪽이 가톨릭 전파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어느 정도 가톨릭이 전파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의 수가 늘어난 뒤에도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반란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 공용어가 생기게 되면 결국 스페인 식민 통치에 저항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성직자들은 스페인 지배계층과 원주민인 필리핀인 사이를 연결하는 통역 겸 중개자의 역할을 하며 필리핀 사회에서 실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일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어 사용 인구의 증가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교육하는 것을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던 성직자들이 무상 공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게 되었으니, 수업은 종교교육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수도사들은 필리핀인 학생들에게 그들이 지능이 낮고 육체노동에만 능숙하다는 식으로 교육하기 일쑤였고, 교실 내 차별도 심했다. 하지만 수도사들의 이런 교육 태도와 열악한 학교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다.
아시엔다 대농장 경영을 통해 부유한 중상류층으로 자리 잡은 메스티조는 자녀들을 스페인 등 유럽으로 유학을 보낼 수 있을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런 교육은 일러스트라도(Ilustrado)라고 불리는 엘리트 지배계층이 생겨나게 했다.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고 유럽의 사상을 접한 일러스트라도스 지식층은 스페인어로 독립선언서를 썼고, 스페인어로 말로로스 헌법을 만들었다. 신문과 문학 작품 역시 대부분 스페인어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어는 엘리트 지배계층의 언어로 사용되었을 뿐 민중의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엘리트 계층 상당수는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엘리트 계층의 언어로 한정되어 있었을 뿐 모든 이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는 못했다고 보면 된다.
스페인어 사용 인구의 감소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1571년~1898년)가 끝나고, 미국 식민지 시대(1898년~1946년)가 시작되면서 영어가 스페인어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필리핀에 미국식 문화가 확산되기를 원한 미국은 스페인과 다른 방법으로 필리핀을 식민지 지배했다. '미국인의 가치관을 가진 필리핀 사람'을 만들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서는 영어를 교육하는 학교 시스템을 필리핀에 도입했다. 미국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만들고자 했고, 영어 교육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필리핀 곳곳에 학교를 세웠다. 미국 육군 수송선 토마스호까지 이용하여 필리핀으로 교사들을 데리고 와서 영어 교육을 진행했다. 좀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 식민지 지배 초창기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이 스페인어를 이용하여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거부하는 글을 썼다는 점이다. 지식인층 대부분이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았던 터라 공통어인 스페인어를 이용하여 미국의 식민지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영어교육이 시작되면서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공립학교에서 스페인어 사용이 금지되고, 1935년 헌법(The 1935 Constitution)는 코먼웰스 정부가 영어로 운영되는 적절한 공립학교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퀘손 대통령은 영어로 대국민 연설을 했고, 많은 것들에 영어로 된 이름이 붙여졌다. 사회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영어의 습득이 필수 요건이 되며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도 높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식민지 기간 중 스페인어 사용인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마닐라의 상류층 가정에서는 여전히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1927년에 텔레비전이 등장한 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29년에 TV의 발명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이 연설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영상을 보면 아기날도가 스페인어로 연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35년 필리핀 헌법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공포되었는데, 헌법 제13조를 보면 "법률에 의해 달리 규정되지 않는 한 영어와 스페인어는 공식 언어로 계속 사용된다"라고 적어둔 것을 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 스페인어 사용 인구가 눈에 띄게 급격히 줄어든 것은 실상 전쟁 때문이었다고 평가된다. 1945년 마닐라 전투에서 인트라무로스 지역이 폭격을 당하며 스페인어 사용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한 것이다. 한편, 1987년 헌법에 따라 현재 필리핀의 공용어는 필리핀어와 영어이다. 스페인어에 대해서는 자발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을 뿐이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1935년 필리핀 헌법: The 1935 Constitution
· President MANUEL LUIS QUEZON: Message to the People of the Philippines | Circa 1920s
· Emilio Aguinaldo Speech in Spanish (1929)
· Esquire: Why the Philippines Is the Only Former Spanish Colony That Doesn't Speak Spanish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