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역사: 1942년, 코레히도르 전투와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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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24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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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베이 입구에 있는 코레히도르섬(Corregidor Island)은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일본에 내주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한 장소이다. 섬 안에 무언가 특별한 보물이 있어서는 아니고, 마닐라 서쪽으로 불과 48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로 취급된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코레히도르섬은 1942년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의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의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퀘손 대통령 역시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약 2달 동안 코레히도르섬을 필리핀 정부의 임시 소재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이 마닐라로 입성하기 나흘 전인 1941년 12월 30일, 마누엘 퀘손 대통령은 포트 밀스(코레히도르 요새)의 말린타 터널 밖에서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취임 선서를 했다.
1942년 코레히도르 전투
Battle of Corregidor
1942년 5월 5일~ 1942년 5월 6일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1월 2일 일본군이 마닐라 입성한 뒤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는 마닐라를 떠나 바탄 반도로 후퇴해야 했다. 마닐라를 오픈 시티(국제법상 전시에 보호를 받는 비무장도시)로 선포하고 마닐라를 떠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코레히도르섬의 말린타 터널(Malinta Tunnel)을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의 본부로 삼아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를 지휘했다. 하지만 미군의 추가 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세에 몰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호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1942년 3월 필리핀을 떠나게 된다. 당시 바탄의 병사들은 바탄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코레히도르 요새(포트 밀스)에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 대해 안전하게 말린타 터널의 방공호에 숨어있다는 뜻에서 더그아웃더그(Dugout Doug)라고까지 불렀지만,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떠난 뒤 필리핀 주둔 미군의 최고 지휘관 자리는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이 맡았다.
1942년 4월 9일 바탄 전투가 끝난 뒤 코레히도르섬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격 대상이 되었다. 바탄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코레히도르섬의 점령에 나선 것이다. 섬에 상주하는 포병 군인들을 위한 영화관이며 야구장과 같은 시설까지 갖춘 코레히도르 요새(포트 밀스)는 '지브롤터'라고 불릴 정도로 방어력이 탄탄해 보였지만, 선박과 총포술의 발전은 1910년을 전후하여 만들어진 박격포를 쓸모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보급품이 제대로 오지 않고 있었다. 식량 배급을 조절해야 할 정도의 악조건 속에서 지속적인 일본의 포위 공격을 막기란 어려웠다.
일본군의 필리핀 점령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국-필리핀 연합군은 한 달 가까이 버텼지만, 일본군의 집중 폭격에 무너지고 만다. 일본에서는 전투기를 동원하여 섬 곳곳에 집중적인 포격을 퍼부었는데, 섬에 투하된 중 폭탄 하나가 탄약고에 떨어져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5월 5일 일본군이 섬에 상륙하면서 사망자 수가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말린타 터널에는 천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병상이 있었지만, 터널까지 부상자를 옮길만한 보충병조차 없는 상황이 닥쳐왔다. 결국 미국의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은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본에 항복 의사를 밝혀야만 했다.
추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코레히도르 전투(Battle of Corregidor)로 연합군의 군인 약 800명이 사망하고, 1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11,000명의 포로는 일본군 포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 역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45년이 되어서야 풀려났다. 여담이지만, 1945년 9월 2일 미국 등 연합국 대표단이 미 해군 군함 미주리호(Battleship Missouri) 위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을 때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뒤에 서 있던 잔뜩 야윈 체격의 남자가 바로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이다. 수세에 몰려 일본에 패배를 인정하고 3년 넘게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던 그가 얼마나 큰 감동을 느꼈을지는 조너던 웨인라이트 장군 본인이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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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UNESCO World Heritage Convention: Corregidor Island and Historic Fortifications of Manila Bay
· US Army Airborne & Special Operations Museum: What Happened During the Battle of Corregidor?
·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Bataan and Corregidor December 1941–May 1942
· United States Navy: General D. A. MacArthur and Loss of Corregidor
· World War 2 Facts: Battle of Corregidor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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