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역사: 톤도 출신의 위대한 평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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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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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한참 먼 옛날, 1863년의 일이다. 1863년은 조선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으려 하던 해였다. 통상 수교를 거부했던 흥선대원군은 나라 밖 이야기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그해 런던에서는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었으며, 노르웨이에서는 표현주의 화가 뭉크가 태어났다. 키가 193cm나 되었다던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던 것도 바로 1863년이었다. 그리고 1863년 11월 30일에는 마닐라의 대표적인 빈민가인 톤도에서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을 만큼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낼 아이였다. '필리핀 혁명의 아버지'가 되어 필리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위대한 평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 그 아이는 바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였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Andrés Bonifacio y de Castro
1863년 11월 30일~1897년 5월 10일
어린 시절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페인 제국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 식민지를 세웠다. 필리핀도 1565년부터 1898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야 했다. 스페인이 조금씩 힘을 잃던 무렵, 1863년 11월 30일의 일이다.
마닐라 톤토(Tondo) 빈민가의 작은 집에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태어났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고 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가난한 집 5남매의 장손으로 태어난 보니파시오의 유년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그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결핵으로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생계가 막막했던 가난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부모까지 모두 잃은 그는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다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규 교육을 받을 형편은 되지 못하였지만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독학으로 법률책을 읽었고, 프랑스혁명에 관해 공부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꿈꾸며 자라났다.
가난에 대한 경험은 보니파시오에게 호세 리잘처럼 평화로운 방법을 가지고는 식민지의 고통을 끝낼 수 없다고 생각을 심어 주었다. 생존을 위해 험한 노동일을 하면서도 스페인 식민 통치 말기 부과된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던 그에게 스페인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정도의 온건한 투쟁은 무의미했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KKK)이란 이름의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카티푸난 무장 독립운동
1892년, 호세 리잘(Jose Rizal)이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민다나오로 추방된 모습을 보고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카티푸난(KKK)이 결성된다. 무장 투쟁보다는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폭력 저항 운동을 했던 호세 리잘과 다르게 비밀결사 단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무장하여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1896년까지 약 4년간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의 회원 확보에 힘썼는데, 단원들은 대부분 착취당하던 노동자와 농민이었다고 한다. 이들 단원들은 부유하고 보수적이던 중산층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는 출신 성분부터 달랐고, 급진적이며 과격한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각지 로컬 혁명 조직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포섭하여 수만 명까지 단원을 늘렸는데, 초기에는 남성들만 단원으로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여성들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단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많이 간다는 식의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896년 5월에 카티푸난의 비밀회의가 열렸지만, 필리핀 독립운동은 그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보니파시오 쪽에서는 즉각적인 부장봉기를 주장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 쪽에서는 무기가 부족하니 날짜를 뒤로 미루자고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직 내부에 반역자까지 등장했다. 비밀회의가 끝나고 난 뒤 카티푸난의 움직임을 눈치챈 스페인 쪽에서 대대적인 검거 작업에 들어갔고, 수백 명의 조직원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힘겨운 상황에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전국적인 무장봉기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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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푸난 내부의 권력 다툼
1896년 8월 29일, 카티푸난(KKK)은 푸가드 라윈의 통곡(Cry of Pugad Lawin)이란 이름의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을 쟁취하는 일은 험난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지만, 무기도 변변치 않은 카티푸난의 단원들이 정식 훈련을 받은 스페인의 군대에 맞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독립운동이 계속되는 동안 카티푸난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니파시오의 지도력에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 와중에 카비테 지역을 담당하던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전투 지원을 멈추었고, 스페인이 카티푸난의 비밀기지까지 색출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이 시기 카티푸난(KKK)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의가 좀 있지만, 1896년 말에 보니파시오가 카비테까지 찾아가 아귀날도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전투지원을 거절했고, 카티푸난 내부에서는 갖가지 소문만 무성하게 생겨났다. 그 소문 중에는 보니파시오의 출신 성분이 빈민가 쪽인 데다가 학력이 낮기에 혁명정부의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 내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된다.
1897년 3월 22일, 카티푸난(KKK)에서는 비밀회의를 열고 혁명 정부를 위한 지도자를 다시 선출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지도자로 당선되게 되었다. 보니파시오를 지지하던 이들이 부정선거의 증거를 내세우며 선거 결과의 무효를 선언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 측근들의 입장을 통제한 채 취임식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카티푸난 회의의 결정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보니파시오는 독자적으로 혁명 정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군사재판
1897년 4월, 카비테 지역을 떠나려고 준비하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게 방문객이 찾아왔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측근이었다. 보니파시오는 이들을 동료로 대접하였지만, 그날 밤 방문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측근에 의해 보니파시오의 일행은 모두 살해당한다. 이날 보니파시오의 아내인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Gregoria de Jesús)가 아기날도의 측근한테 겁탈당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보니파시오가 동료를 모두 잃은 채 체포되는 처지가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보니파시오는 체포 이후 마라곤돈 시내의 로데리코 레예스의 집으로 끌려가 군사재판(Court Martial)에 회부되었고, 한때는 동지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반역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 대한 사형 판결을 놓고 정치적 목적에 의한 사법살인(legal murder)이라고 보는 역사학자가 꽤 많은데, 당시 재판에 있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측근만으로 재판관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보니파시오와 에밀리오 아기날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을 놓고 서민층을 대변하는 보니파시오가 상류층을 대변하는 아기날도에게 패배한 싸움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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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의 죽음 이후
1897년 5월 10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분티스 산(Mt. Buntis)으로 끌려가 동생과 함께 총살된다. 그리고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죽은 다음 해,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을 통해 스페인 정부는 나중에 필리핀은 미국에 양도했다.
안타까운 것은 처형 이후 벌어진 일들이다. 반역죄로 총살당했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은 방치되어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지지 못했다. 보니파시오 사후에 그의 부인이 한 달 넘게 산속에서 시신을 찾아 헤맸다는 것은 퍽 유명한 일화로 나중에 그 이야기가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게다가 보니파시오가 죽은 뒤 상당히 많은 혁명군이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환멸을 느껴 조직을 떠났다. 그리고 결국 카피푸난 조직은 조직 간의 통합된 명령 체계를 잃고 와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죽고 난 뒤 영웅 호칭이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반역자였던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혁명의 아버지'로 국가 영웅이 되기까지는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논쟁과 시간이 필요했다.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가 그렇게 비극적인 총살을 당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였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보니파시오가 태어난 11월 30일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1월 30일을 보니파시오의 날(Bonifacio Day)이란 이름의 공휴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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