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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896년, 호세 리잘의 죽음을 불러온 카티푸난(KKK) 푸가드 라윈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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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콘텐츠 등록일:

2024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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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ipunan Initiation Rites, Ayala Museum
카티푸난의 입문 의식을 표현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1892년 7월 3일, 호세 리잘은 필리핀 민족동맹(La Liga Fulipina)이란 이름으로 스페인 식민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비폭력저항 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호세 리잘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매우 온건한 단체였지만, 스페인 총독부가 보았을 때는 이 단체의 설립자가 필리핀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호세 리잘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필리핀 민족동맹을 해산시킬 이유가 충분했다. 결국 1892년 7월 7일 호세 리잘은 마닐라를 떠나 민다나오 타피탄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과 같은 필리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세 리잘처럼 민족의 독자성이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세 리잘이 민다나오섬으로 추방되던 그날 밤의 일이다. 데오다토 아렐라노Deodato Arellano)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 호세 디존(José Dizon) 등이 모여 카티푸난(KKK)이란 이름으로 무장 혁명을 위한 비밀결사단체를 만들어 낸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무장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필리핀 민족동맹의 조직과 해산, 그리고 카티푸난(KKK)의 결성까지 이 모든 일이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셈이었다.




 

카티푸난(KKK)

Katipunan

Kataastaasang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

(Supreme and Venerable Association of the Children of the Nation)

1892년 7월 7일 결성

민족주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

 

마닐라의 아테네오 대학 근처에 가면 카티푸난 애비뉴(Katipunan Avenue)라는 이름의 도로를 볼 수 있다. 필리핀의 역사 속에서 카티푸난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면, 정답은 간단하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만들었다는 스페인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필리핀 독립운동 단체가 바로 카티푸난(KKK)이다.


카티푸난(Katipunan)은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협회(association) 또는 '다 함께'라는 뜻의 의미가 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필리핀에 있었던 비밀 혁명 단체인 카티푸난의 정식 명칭은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인데, 필리핀에서 KKK라고 하면 보통 이 카티푸난을 의미한다.


카티푸난(KKK)은 필리핀 민족동맹과 다르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추구하였다. 호세 리잘의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이 실패한 것을 본 KKK 비밀결사 단원들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무장하여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푸가드 라윈의 통곡

Cry of Pugad Lawin


필리핀에서 8월은 매우 무더운 시기이다. 1896년 8월 어느 날, 카티푸난은 보니파시오의 주도 아래  퀘존 발린타왁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선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푸가드 라윈의 통곡(Cry of Pugad Lawin)으로 발린타왁에서 혁명을 외쳤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 혁명이 시작된 날짜와 장소에 대한 의견은 좀 분분하다. 푸가드 라윈의 통곡이 마닐라 발린타왁 쪽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도 있지만, 필리핀 혁명의 어머니로 불리는 탄당 소라(멜코라 아키노)의 아들의 집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도 있다. KKK의 은신처로 사용되던 이 집 마당에 매의 둥지가 있었기에 푸가드 라윈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그 시작 장소야 어찌 되었든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비롯하여 KKK의 단원들이 대거 모여 "필리핀 만세!"를 외치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한 보니파시오의 군대가 승리하기란 어려웠다. 독립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무기도 변변치 않은 카티푸난의 단원들이 정식 훈련을 받은 스페인의 군대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카티푸난의 독립군은 스페인 군대와의 교전에서 계속 패배했고, 마닐라를 떠나 북쪽 몬탈반으로 계속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시오는 스페인 군대에 크게 패배하여 산악지역으로 후퇴하면서도 게릴라전술로 저항했지만,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야사에 따르면 퇴각하던 보니파시오가 카비테 지역을 담당하던 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스페인이 카티푸난의 비밀 은신처를 색출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의 지도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전투 지원을 멈춘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의 혁명을 끝까지 도와서 보니파시오의 신뢰를 얻고 카티푸난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를 무능한 지도자로 몰아가서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쪽의 이야기가 더 많다.


한편, 푸가드 라윈의 통곡은 호세 리잘(Jose Rizal)이 처형당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필리핀 혁명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스페인에서 호세 리잘을 카티푸난의 푸가드 라윈의 통곡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사형한 것이다. 1896년 11월 13일에 산티아고 요새에 수감된 호세 리잘은 1896년 12월 30일 바굼바얀(현재의 리잘파크)에서 처형당했다.


국가 영웅의 날

National Heroes Day


푸가드 라윈의 통곡에서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필리핀 정부에서는 매년 8월 넷째 주 월요일을 국가 영웅의 날(National Heroes Day)로 기념하고 있다. 보니파시오 데이나 리잘데이와 다르게 영웅의 날은 어느 특정 영웅이 아닌 필리핀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Katipuneros라고 불렸던 KKK 비밀결사 단원들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 있는 박물관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
카티푸난을 상징하는 KKK 깃발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
카티푸난을 상징하는 KKK 깃발
flag of Republic of Biak-na-Bato
flag of Republic of Biak-na-Bato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보니파시오의 모습을 묘사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보니파시오의 모습을 묘사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호세 리잘과 KKK
호세 리잘과 KKK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NHCP(National Historical Commission of the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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